설교·로마서 12:1-2·2026년 7월 18일

같은 본문, 세 회중 — 로마서 12:1-2 설교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장년·청년·새가족. 같은 로마서 12:1-2이 청중에 따라 어떻게 다른 설교가 되는지 도입부를 비교해 봅니다.

로마서 12:1-2

같은 로마서 12:1-2 본문이라도, 강단 아래 앉은 이들이 누구인가에 따라 설교는 전혀 다른 옷을 입어야 합니다. SermonSage에서 청중 설정만 바꿔 같은 본문으로 세 편을 만들었습니다 — 장년 회중, 청년부, 그리고 새가족. 도입부만 비교해 읽어보셔도 차이가 느껴지실 것입니다.

> ✓ 본 설교는 91만 청크 신학 자료에 근거해 작성되었고, 표절·이단 패턴 검증을 통과했습니다.

장년 회중에게 —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제목: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주제: 하나님의 자비에 응답하는 성도의 삶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드리는 살아있는 제사입니다.

서론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을 '어떤 행위를 하는 것'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주일에 예배당에 앉아 있는 시간, 정해진 기도의 분량, 혹은 교회 안에서 맡은 봉사의 직분이 곧 나의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제물'은 죽어 있는 짐승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우리의 삶은 매일의 일상이라는 제단 위에 놓여 있습니다. 직장에서의 치열한 경쟁, 가정에서의 인내, 경제적 압박 속에서 드리는 한숨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제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 일상을 하나님과 분리합니다. 예배당 밖의 삶은 나의 것, 예배당 안의 삶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경계를 허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한 자라면, 그 자비가 나의 전 존재를 뒤덮고 있음을 깨달은 자라면, 이제는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앞선 11장까지 이어진 복음의 거대한 진리, 즉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의롭다 하셨는지에 대한 선언 위에 세워진 '그러므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은 우리가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응답인 셈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확인해야 할 진리는 명확합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몸'으로 드리는 것이며, 그 몸은 이 시대의 풍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구별된 거룩한 제물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거룩한 제사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1대지. 하나님의 자비에 응답하는 합당한 예배 — 몸을 드림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드리라'는 단어는 단순히 무엇을 건네주는 행위가 아니라, 원래는 곁에 서다 혹은 제시하다(παρίστημι, 파리스테미)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 시대 제사장이 제물을 제단 앞에 가져다 놓았던 것처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그분의 임재 앞에 온전히 내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몸'이라는 단어입니다. 당시 헬라 철학의 영향 아래 있던 사람들은 몸을 영혼의 감옥으로 보거나, 몸으로 짓는 행위는 영적인 것과 상관없다고 치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몸이야말로 신앙의 현장임을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추상적인 결심이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의 실제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우리가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는 방식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내용이 됩니다. 이를 '영적인 예배' 혹은 '합리적인 봉사'(λογικός, 로기코스)라고 부릅니다. 이 예배는 단순히 의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깊이 이해한 자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이성적이고도 인격적인 반응입니다. 즉,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가겠다는 의지적 결단이 포함된 예배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제 마음을 드립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내 몸은 내가 원하는 곳으로 향하게 합니다. 내 시간은 나의 만족을 위해 쓰고, 나의 에너지는 세상의 성공을 위해 소진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은 나의 전 존재, 나의 삶의 모든 흔적이 담긴 몸입니다. 내 몸이 있는 곳에 내 마음도 있고, 내 몸이 행하는 곳에 나의 신앙이 증명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처럼, 이제는 우리도 그 사랑에 빚진 자로서 우리의 몸을 주님의 도구로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입니다.

2대지. 세상의 틀을 깨고 변화되는 마음 — 새롭게 함

우리가 하나님께 몸을 드리는 예배자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다. 바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본받지 말라'는 표현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에 우리 자신을 끼워 맞추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입니다(συσχηματίζω, 쉬스케마티조).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성공의 기준을 제시하고, 소비의 가치를 강요하며, 자기중심적인 삶이 지혜롭다고 유혹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 세상의 틀(schema)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언어로 말하고 세상의 가치로 판단하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유혹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변화'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메타모르포오(μεταμορφόω)인데, 이는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되는 것과 같은 근본적이고 내적인 변형을 뜻합니다. 세상은 외적인 형식을 바꾸라고 하지만, 복음은 마음의 뿌리부터 바꾸라고 합니다. 우리의 생각, 가치관, 판단의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재편되어야 합니다. '새롭게 함'(ἀνακαίνωσις, 아나카이노시스)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매일 성령 안에서 우리 생각의 결을 하나님의 뜻으로 갱신해가는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많은 이들이 삶의 환경이 바뀌면 신앙도 자연스럽게 좋아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환경이 변해도 마음의 중심이 세상의 틀에 고정되어 있다면, 결국 그 환경마저도 세상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진정한 신앙의 성숙은 내가 보던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다시 보게 될 때 일어납니다. 우리가 세상의 논리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δοκιμάζω, 도키마조)하려 할 때, 비로소 우리의 일상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경험하는 역동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자신의 의지나 도덕적 결단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우리 내면의 주인으로 모셔 들일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많은 성도가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합니다. 직장에서는 효율과 성과만을 최고의 선으로 삼고, 가정에서는 세상이 정해준 성공의 척도를 자녀에게 강요하며, 교회에서는 그저 종교적인 의무만을 수행하는 분열된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주일의 예배와 평일의 삶이 조화를 이루는 통합된 영성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과정은 짙은 안개 속에서 나침반을 확인하며 길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소음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조급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은 세상의 거센 파도 위에서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평안분별력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으실 때,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일시적인 세상의 유혹인지 명확히 구별하는 영적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 해외 성경 연구 데이터 참고 (로마서 12:2)

3대지. 하나님의 뜻을 입증하는 공동체의 거룩한 영적 분별력

우리가 세상의 틀을 벗어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입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입증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지식적으로 아는 단계를 넘어, 삶의 현장에서 그 뜻이 참됨을 실제로 드러내어 증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성과와 즉각적인 만족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그 흐름을 거슬러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의 가장 좋은 길임을 온몸으로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경건을 넘어, 공동체가 서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을 증명하는 거룩한 연합의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 뜻을 세 가지로 규정합니다. 첫째는 선함(아가토스, ἀγαθός)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변함없는 가치를 의미합니다. 둘째는 기뻐하심(유아레스토스, εὐάρεστος)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만족스럽고 즐거워하시는 상태를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온전함(텔레이오스, τέλειος)입니다. 이는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계획을 의미합니다. 우리 개개인이 세상의 가치관에 함몰되어 있을 때는 결코 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몸을 드리고 마음을 갱신할 때, 비로소 우리의 시야는 개인의 욕망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확장됩니다. 공동체는 바로 이 확장의 현장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목격하고, 서로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는 법을 배우며, 함께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분별력은 결코 우리 자신의 탁월한 지능이나 종교적 열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경고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입증하는 핵심은 자신의 역할을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 안에서 겸손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합니다. 자신의 은사를 과대평가하여 타인을 판단하거나, 자신의 역할을 과소평가하여 헌신을 포기할 때 하나님의 뜻은 가려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공동체는 '나'라는 주체를 내세우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몸, , 소마)이라는 유기적인 질서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서로를 의지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입증한다는 것은, 한 지체의 아픔을 공동체 전체가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한 지체의 은사를 공동체 전체의 유익으로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모두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서로를 밟고 올라서야 승리하는 경쟁의 틀을 제시하지만,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는 서로를 세워주어야만 승리하는 은혜의 틀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부족함을 채우며, 끝까지 인내하는 모습이야말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입증하는 현장이 될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을 통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했습니다. 신앙은 관념적인 고백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드리는 '거룩한 산 제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크신 자비(오익티르모스, οἰκτιρμός)를 기억한다면, 이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리는 것은 마땅한 반응입니다. 세상의 거센 유혹과 가치관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명령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틀을 거부하고, 날마다 성령 안에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입을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이 땅 위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 삶을 살 수 있는 힘은 우리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단번에 온전한 제물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기 위해, 친히 하나님의 거룩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는 다시 살게 되었고, 이제는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거룩한 산 제사는 결코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점령할 때, 비로소 우리도 기꺼이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놓는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기도로 결단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주님의 자비하심을 잊고 살았음을 회개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온전히 내어주셨듯이, 이제 저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산 제물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의 가치관에 우리를 끼워 맞추지 않게 하시고, 날마다 성령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서로를 섬기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거룩하게 세워가는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거룩한 산 제사로 받아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전문은 SermonSage에서 완성됩니다)*


청년부에게 —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제목: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주제: 하나님의 자비에 반응하여 자신의 삶 전체를 거룩한 예배로 드리는 것이 성도의 합당한 삶입니다.

서론

우리는 신앙을 주일 예배 시간이나 개인적인 간구의 시간으로 한정 짓곤 합니다. 특히 진로와 관계, 그리고 내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소용돌이 속을 지나는 청년의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라는 거창한 단어를 던지십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단순히 주일의 순서가 아닙니다.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은 바울 사도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강력하고도 실제적인 권면입니다. 바울은 1장에서 11장까지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임했는지를 논리적으로 서술해 왔습니다. 그리고 12장에 이르러 비로소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통해 삶의 현장으로 우리를 밀어 넣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저 천국에 가기까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올려지는 하나의 '제사'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특정한 종교적 행위를 넘어,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전체가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요구하시는 진정한 예배의 영적 원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론

1대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근거로 드리는 삶의 예배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권하다'라는 단어는 곁으로 불러서 간절히 호소한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 부르다/간청하다)입니다. 이는 단순히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녀를 설득하고 격려하는 애타는 부름입니다. 바울이 이 권면의 근거로 삼은 것은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시간, 재능, 열정, 심지어 우리의 몸까지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다시 드리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제물'이라는 단어는 투시아(θυσία, 희생/제물)를 사용합니다. 구약 시대의 제물은 죽어서 드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산 제물'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날마다 우리 자신의 욕망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 즉 우리가 실제로 밥을 먹고, 공부하고, 직장에서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그 모든 구체적인 삶의 자리가 바로 예배의 현장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라트레이아(λατρεία, 직무/봉사), 즉 합당한 영적 예배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삶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자비에 대한 가장 마땅하고도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진로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까? 그 고민의 과정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있습니까? 그 아픔을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대단한 업적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당신의 자비 안에서 살아가려는 그 마음의 태도를 보십니다.

2대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받는 변화

하나님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은, 필연적으로 세상의 가치관과의 충돌을 일으킵니다. 바울은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여기서 '본받지 말라'는 단어인 쉬스케마티조(συσχηματίζω, 형태를 같이 하다/동조하다)는 세상이 찍어내는 틀에 우리 자신을 끼워 맞추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성공의 기준, 행복의 조건, 가치 있는 인생의 정의를 주입합니다. 세상의 틀은 우리에게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빨리 앞서가고,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을 꾸미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틀을 거부해야 합니다. 대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메타모르포오(μεταμορφόω, 변화시키다/변형시키다), 곧 근본적인 변형입니다. 이것은 겉모습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애벌레가 완전히 다른 존재인 나비로 변하는 것과 같은 생명력 있는 변화를 뜻합니다. 이 변화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여기서 '새롭게 함'을 뜻하는 아나카이노시스(ἀνακαίνωσις, 새롭게 함/갱신)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일으키시는 갱신 작업을 말합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너무나 쉽게 세상의 습관에 젖어듭니다. 경쟁이 당연하고, 효율성이 최고이며, 나를 증명해야만 가치 있다고 믿는 그 사고의 체계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의 이성적 판단과 마음의 방향을 완전히 새롭게 빚어 가십니다. 여러분이 진로를 결정할 때, 세상은 "어디가 연봉이 높고, 어디가 안정적인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은 "어디에 있을 때 내가 하나님을 더 깊이 예배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날마다 세상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방향성'입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뜻을 도키마조(δοκιμάζω, 시험하다/입증하다), 즉 확인하고 입증하려 애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당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 땅 가운데 나타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세상의 틀에 찍혀 나온 똑같은 결과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빚으시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거룩한 작품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개인의 내면을 다듬는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의 문맥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우리 개개인이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지체라는 사실입니다. 12장 3절 이하에서 이어지는 가르침은, 우리가 변화된 마음으로 세상의 흐름을 거스를 때, 결과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을 '경쟁의 대상'이 아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중한 지체'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 생각의 틀을 고집하곤 합니다. 나의 경험, 나의 성공 방식, 나의 자존심이라는 단단한 껍데기를 깨뜨리지 못한 채 그 안에 하나님을 가두려 합니다. 그러나 참된 변화는 나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을 델레마(θέλημα, 뜻/의지/소원) 앞에 굴복시킬 때 시작됩니다. 이 과정은 고통스럽습니다. 때로는 나의 자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세상으로부터 '어리석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부서짐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 가시는 가장 확실한 증거임을 기억하십시오. 📖 해외 성경 연구 데이터 참고 (로마서 12:3-5)

3대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입증하는 삶

우리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마음을 새롭게 할 때, 비로소 도달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별한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계산기를 두드리는 작업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분별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직접 확인하고 입증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시험하여 입증한다는 의미를 지닌 도키마조(δοκιμάζω, 시험하다/입증하다)입니다. 이 단어는 고대 사회에서 금속의 순도를 확인하기 위해 불에 달구어 그 진실함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관념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라는 뜨거운 현장에 던져졌을 때 비로소 그 거룩한 정체가 드러나는 실재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은 우리 삶의 모든 고난과 갈등을 통과하는 기준이 됩니다. 우리가 진로의 막막함 속에서, 혹은 인간관계의 단절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 인생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완전한 순종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뜻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직접 맛보아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화려한 제안을 거절하고 좁은 길을 택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그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분별력입니다. 📖 펄핏 주석(Pulpit Commentary) 참고 분석 (로마서 12:2)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시는 뜻을 결코 우리를 파괴하는 것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때로 우리의 계획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가장 온전한 자리로 이끄시는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나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내 삶을 통치하시도록 내어드리는 항복의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옥죄는 감옥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 너무나 멀고 희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청년의 시기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어는 때로 우리에게 가장 큰 압박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거창한 계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이 마주한 일상에서 정직을 지키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품으며, 주어진 학업과 노동에 성실히 임하는 그 작은 순종이 모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룹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전제 조건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야 성공할 수 있지 않습니까? 거룩한 산 제물이 되면, 세상에서 뒤처지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실존적인 반론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왕관을 거부하고 십자가의 수치를 선택하셨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실패처럼 보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순종을 통해 인류 구원이라는 가장 온전한 뜻을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생명과 승리가 우리에게 임함을 입증하는 최고의 증거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가장 앞서 맛보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신비로운 신탁이나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로만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구체적인 통로로 마음의 변화(ἀνακαίνωσις, 아나카이노시스 — 낡은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성령으로 새롭게 형성되는 지적인 갱신)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머릿속의 생각을 바꾸는 차원을 넘어, 세상을 보는 안경을 교체하는 작업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효율성과 성과라는 잣대로 형태를 만들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세상의 틀에 맞추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잣대로 삼아 내 삶을 다시 재단해야 합니다. 직장에서의 성취가 우상이 되고, 관계에서의 평판이 구원보다 앞서게 될 때, 우리는 즉시 멈추어 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룩한 구별'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 해외 성경 연구 데이터 참고 (로마서 12:2)

이 과정에서 겪는 갈등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치열하게 일하고 계시다는 징표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겪는 이 팽팽한 긴장은,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역설적인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은 내 인생의 모든 결정권을 하나님께 양도하는 '서명'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 서명을 주저하며 하나님께 인생의 보증인 역할만 요구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증인이 아니라 주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계획이 무너지는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더 깊은 생명의 계획이 있음을 신뢰하십시오. 지금 당신이 겪는 막막함은 하나님의 뜻이 부재한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비로소 당신의 삶을 통해 구체화되기 시작하는 새로운 시작점입니다.

*…(전문은 SermonSage에서 완성됩니다)*


새가족·구도자에게 —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제목: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주제: 구원받은 성도는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서론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성공을 위해, 혹은 행복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는 티켓을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사셨으며, 이제는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선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로마서의 거대한 교리적 논증이 끝난 후, 사도 바울이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실제적인 삶의 지침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바울은 인간의 죄성, 하나님의 의,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원의 은혜를 논리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12장 1절에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통해 그 놀라운 복음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구원은 결코 머리로 아는 지식에 머물지 않습니다. 구원은 반드시 삶의 변화라는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새가족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오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몸'을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몸은 단순히 육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의 시간, 나의 재능, 나의 계획, 나의 관계, 즉 내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삶 전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긍휼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안다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이 어떻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될 수 있는지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1대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 감격에서 시작되는 헌신

신앙의 시작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비라는 단어는 긍휼(οἰκτιρμός, 오크티르모스, 불쌍히 여김)이라는 헬라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누군가의 비참한 처지를 보고 그 마음이 깊이 움직여 고통을 함께 느끼는 하나님의 마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그 사랑이 바로 이 긍휼입니다. 왜 바울은 헌신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언급했을까요? 율법은 우리에게 "하라"고 명령하며 우리를 압박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먼저 깨닫게 함으로써,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게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만 안다면 우리의 헌신은 금방 식어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내 영혼 깊은 곳에 닿아 있다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결코 무거운 짐이 되지 않습니다. 많은 구도자가 신앙을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려야 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봉사하거나 헌금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헌신은 '내가 받은 사랑이 너무나 커서 당연히 드리는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빼앗으려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헌신이 시작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행하신 그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 자비하심을 깊이 묵상해 보셨습니까? 헌신은 강요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가장 자연스럽고도 마땅한 응답입니다.

2대지.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 삶으로 드리는 예배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드리다'라는 단어는 파리스테미(παρίστημι, 곁에 두다)라는 헬라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제사장이 제물을 제단 위에 올려놓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의 제물은 죽어서 드려졌지만,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제물은 '산 제물'입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하다(ἅγιος, 하기오스)'는 말은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많은 새가족이 교회 밖의 삶과 교회 안의 삶을 분리합니다.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고, 평일에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욕심과 경쟁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이 예배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는 주일의 1시간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우리가 일터와 가정에서 맺는 모든 관계와 선택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몸을 드린다는 것은, 이제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내가 쥐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나의 직장 생활도, 나의 자녀 교육도, 나의 물질 사용도 모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대로 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영적 예배(λογικός, 로기코스, 합리적인)'입니다.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은 '이성적인', '합리적인'이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즉,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의 삶 전체를 드리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의 일터가 제단이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을 향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게 하십시오. 주님께서는 화려한 건물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내는 여러분의 하루를 더 기쁘게 받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보며 '어리석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드리는 이 영적 예배는 세상의 셈법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소유를 늘려야 성공이라고 가르치지만, 하나님 나라의 논리는 정반대입니다. 나를 비워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우리 안에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활동에 열심을 내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 의지, 그리고 시간의 우선순위까지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이 직장에서 정직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것, 누군가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보복 대신 기도를 선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제단 위에 자신을 올려놓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바울은 이 제사를 '합리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죄의 굴레에서 건져내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단번에 제물로 삼으신 그 놀라운 자비에 비하면, 우리가 드리는 이 삶의 헌신은 너무나 작고 마땅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 해외 성경 연구 데이터 참고 (로마서 12:1)

3대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 —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거룩한 분별력

우리가 세상의 틀을 거부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을 때, 비로소 도달하게 되는 최종적인 지향점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본문 2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우리가 변화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δοκιμάζω, 도키마조, 시험하여 증명하다)하게 하려 함"입니다. 여기서 분별한다는 말은 단순한 지적 이해를 넘어, 불순물이 섞인 금속을 불에 달구어 순수한 금을 가려내듯,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실제적으로 증명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왜 우리는 세상의 흐름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까?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제시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타협과 경쟁이 필수적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허무함과 영혼의 고갈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ἀγαθός, 아가토스, 좋은)', '기뻐하시고(εὐάρεστος, 유아레스토스, 흡족한)', '온전합니다(τέλειος, 텔레이오스, 완전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한 굴레가 아니라, 우리를 가장 복되고 생명력 있는 존재로 빚어가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거룩한 분별력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굳게 서게 됩니다. 많은 구도자가 신앙의 길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맞습니까?", "이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까?"와 같은 질문들 속에서 우리는 종종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방황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비결이 특별한 계시를 받는 것에 있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에 있다고 단언합니다. 우리가 예배자로 살기로 결단하고 일상에서 거룩한 산 제물이 될 때, 우리의 내면은 하나님의 뜻을 수신할 수 있는 깨끗한 안테나로 변화됩니다. 불순물이 섞인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 온전히 드려진 마음만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 오늘 우리가 처리해야 할 업무,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물질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 올라가라고 속삭이지만, 주님은 '더 낮게, 더 겸손하게, 더 사랑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충돌 지점에서 우리는 매일 시험을 치릅니다. 우리가 세상의 기준을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증명할 것인가. 분별력은 타고난 지혜가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통해 자라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불이익을 줄까 봐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온전한 뜻'은 결코 우리의 불행을 담보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무엇이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지, 무엇이 우리를 가장 가치 있게 만드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과 시련조차도 그분의 선하신 뜻 안에서는 우리의 영혼을 빚으시는 거룩한 재료가 됩니다. 그러므로 분별력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그 사랑을 신뢰할 때, 우리는 비록 눈앞에 당장 손해가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분별력을 잃어버린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갈망입니다. 세상의 소음은 우리를 끊임없이 혼란스럽게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면 우리는 그 혼돈 속에서도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분별력은 우리를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르게 살 때, 비로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기쁘심과 온전하심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이며,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가장 큰 영광입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의 간절한 권면을 통해 우리 인생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를 돌아보았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 안에서의 종교적 행위를 넘어, 우리의 전 존재를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두는 결단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이 시대 속에서 그분의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제사장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의 헌신은 결코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산 제물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먼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온전히 드려 영원한 제물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는 제물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가 드리는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십자가 은혜에 대한 마땅한 반응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며 우리 마음을 주님께 드립시다. 우리가 짊어진 세상의 무거운 짐, 우리를 가두었던 세상의 틀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읍시다. "주님, 내 삶이 주님의 선하신 뜻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길 원합니다. 내 생각과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날마다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받으소서. 우리의 연약한 마음과 분주한 일상을 주님의 제단 위에 올립니다.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흘러가게 하시고, 세상의 방식이 아닌 주님의 온전한 뜻이 우리 삶을 통해 완성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거룩한 예배자로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전문은 SermonSage에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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